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문단 편집) === 정치적 성향 === 이처럼 초기 나치 당원들은 구제국서 기득권층이긴 했지만 [[프로이센]]에 밀려 주류는 아니었던 [[바이에른]] 지역 출신이 많았고 정치적 욕구가 좌절되었던 신흥계층 출신이 주도했다. 바이에른 지역에서 유행한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나치당 당명인 '국가(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서 볼 수 있듯이 좌익 이론과 급진 반체제 사상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이는 [[전통주의]]적 가치관을 지키고자 했음에도 외세의 영향력에 맞서 [[보수혁명|급진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당대 보수주의자들의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허나 말 그대로 영향을 받은 것이지 결국 기본 축은 당대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탈민족주의, 프롤레타리아 그 자체에 대한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고, [[사회민주주의]]처럼 부르주아 자본계급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으며,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모두 포괄하는 민족 공동체에서 모든 민족들이 서로 협동하는 [[조합주의]]적 사회주의였고, 나치즘에서 말하는 사회주의란,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이 아니라, 민족이 주체가 되는 사회주의''', [[민족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였으며, 유대인 음모론에 심취하여, 유대 프리메이슨과 유대 볼셰비키와 유대 자본가들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독일 민족을 지배하려 한다고 보았다. >민족공동체 개념은 나치체제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개념이다. 나치는 민족공동체의 형성을 약속하면서 정치와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를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구축하고자 했다. 연구개념으로서의 민족공동체는 첫째, 나치에서의 변화된 정치적·사회적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며, 두번째 사회적 약속을 통해 주민들을 동원하는 기제이며, 세 번째 나치체제의 통합과 배제의 특성을 지칭한다. >나치의 사회정책은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와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나치는 계급투쟁을 극복하고 민족공동체를 수립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적 파트너쉽에 기초한 바이마르의 노동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기업공동체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새로운 나치적 노동질서를 수립하였다. 민족공동체와 업적공동체를 수립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노동전선은 노동자들을 규율하는 동시에 체제 내로 통합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정책적 활동을 벌였다. 노동전선의 산하조직인 기쁨을 통한 힘은 여행, 스포츠, 문화활동 등의 다양한 여가를 노동자에게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통합하고자 시도하였다. 노동의 아름다움은 공장의 환경을 개선하고 합리화함으로써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자들의 통합을 촉진하려는 시도였다. >사회보험분야에서 나치는 조직을 통합하여 행정합리화를 추진하는 한편 보험료는 올리고 급여는 낮추어 재정의 안정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사회보험의 구체적 운영은 인종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며 군수산업과 전쟁준비에 복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복지분야에서 민족복지회는 나치 최대의 조직으로서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사회적 약자가 아닌, 민족의 동지와 ‘가치있는 자’에게 다양한 후생복지혜택을 제공하여 미래의 건강한 민족을 재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에게 복지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민족복지회의 활동은 근대적 성격의 가족·인구정책을 발전시켰지만 그것은 철저히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월동구호단은 민족은 스스로 돕는다는 구호 아래 전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자선모금활동을 벌였고, 이것은 민족공동체의 실현의 징표로서 선전되었다. >나치 사회정책의 많은 부분은 독일제국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이어지는 근대화 과정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나치의 사회정책은 복지국가의 민주주의적 성격을 제거하고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의 자리에 민족을 대치함으로써 퇴행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 >신명훈, 독일 복지국가 담론의 역사: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와 사회정책, 독일연구 2015, vol., no.29, pp. 155-198 (44 pages)[[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011747|#]]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자가당착, 그리고 이 두 이념의 종합은 독일 사상사의 핵심 내용이다. 1918년에서 1945 사이의 이데올로기 논쟁은 이를 둘러싼 것이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이에 따라 과거로부터 전승된 자부심이 손상되고 전통적인 프로이센 군주 질서가 파괴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변화된 정치 조건에 대항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획득하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의 핵심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종합하려는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논의이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의 전개는 NSDAP(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 나치당)의 건설과 확장과정과 일치한다. '''1933년의 나치의 권력 획득과 함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종합은 공공연히 사회전반에 적용된다. 민족 부르주아지 측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인 것은 “민족 사회주의”나 좀바르토(Sombart)가 말하는 “법치 사회주의”이며, 이들은 좌파 사회주의, 즉 맑스 사회주의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스스로 이해되고 있다.''' 1933년 이전까지의 논쟁에서는 여러 입장들이 주장되었지만 1933년 이후에는 단지 히틀러를 사회주의 혁명가로 표현하고 우상화하는 글들만이 만연된다. (1933년 이전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정리중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특이할 사항은 사회주의를 민족의 공동체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민족과 사회주의를 접합시키려는 노력이외에도 1890년대에 발행되어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퇴니스 (Toennis)의 저작 “공동체와 사회(Gemeinschaft und Gesellschaft)가 1920-30년대에 6판까지 발행되었다는 점이다 자세한 논쟁은 준비중”) >... >'''독일의 부르주아지 이론가들에게는 자본주의 역시 “서구적인 것” 또는 “유대인의 상인정신”의 전형적인 산물로써 비난받았다''' (대표적인 학자가 좀바르트). 민족적인 입장으로 정리한 사람은 자본주의를 어떤 “낯선 것”, “서구로부터 강제된 체제” 또는 “증오스러운 자유주의의 경제체제”로 간주하였다.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의 차용으로 독일은 서구의 규칙에 종속되었다. >----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에서 민족사회주의로의 이행: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독일 논쟁정리[[https://www.krm.or.kr/krmts/link.html?dbGubun=FRBR&metaDataId=4b76f6dc145edc45011463870cdb2a79|#]] 독일의 [[보수혁명]]은 기본적으로 반서구주의를 내세우며 민족적인 가치관을 주장했었는데, 자유주의(자본주의)와 볼셰비즘(공산주의) 모두가 외세나 유대인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반대하였다. 이 당시 독일은 [[보수혁명 운동|민족주의 우파 진영에서도 반자본주의 성향이 높았다.]] "천박한 부르주아들은 돈만 되면 나라건 민족이건 다 팔아먹는다"는 [[디스]]는 일반적인 것이고, [[고트프리트 페더]]처럼 은행 국유화, 이자율 폐지 주장[* 영미 약탈 자본은 유대인에 장악되었다면서 독일인의 산업 자본은 유익하다곤 했다.]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때 '''부당 이득자 벼락부자들은 유대인과 같이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게 히틀러의 나치당 초기 연설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런 성향은 나치당 좌파로 분류되는 [[괴벨스]], 그레고어 슈트라서로 이어지며 슈트라서는 숙청 되지만 괴벨스는 승승장구하면서도 사회주의 성향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괴벨스]] 역시 자신의 영도자인 [[히틀러]]를 위해 자신의 '''사소한''' 의견 따위는 접어두었다.] 이들 나치당 좌파의 주장은 나치즘 양대 축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 우위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나치당 내부에서 주류 우파의 주장과 충돌했다. 괴링 등의 나치 우파는 노동자를 먼저 민족주의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슈트라서 형제와 괴벨스 등의 나치 좌파들은 먼저 사회주의를 하지 않으면 노동자들을 볼셰비즘[* 당시 나치당은 레닌이 추구하는 공산주의는 볼셰비즘, 레닌주의 공산당은 [[볼셰비키]]로 불렀다.]에 빠지지 말라고 설득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 나치의 이론에 의하면 나치즘에서 이상인 초계급적 국가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공조하며 계급 투쟁을 배격하지만 사회 변혁을 이끌 주체는 어디까지나 '노동자 계급'이기 때문에 노동자를 이념상 중요시 했다. 자본가는 국가사회주의에서 민족의 이익 범위 안에서만 사유재산 추구가 인정된다고 보았고, 농민들은 나치이론에 빈농층에 대한 보조금 지급, 흉년 등의 재해시 정부가 직접 농산물을 구입하거나 인력을 보내 지원하는 등 사상적인 것보다는 결과적 이론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노선으로 히틀러의 나치당은 초창기에 농민들의 [[콘크리트 지지층|강력한 지지]]를 받아왔었다.[* 다만 농민들은(특히 프로이센 농민) 대단히 보수적이기에 나치당의 대두 전에도 국가인민당을 주로 지지했다. 자기 소유의 토지를 신성시하는 자영농들이 사회주의를 좋아한 적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다가 나치가 성장하고 특히 집권 후 사회주의 성향이 바뀌게 되었고 [[독일노동전선]]으로 국가사회주의 사상 획일화 조치로 볼셰비즘으로 의심된다는 노동조합을 박살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휴가와 여가를 누리게 만드는 목적인 '기쁨의 힘'이나 '국민차 계획(폭스바겐)'처럼 노동 계층에 부합한 정책도 있었고 무엇보다 임금을 다소 깎거나 여성들을 노동 현장에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식으로 실업자 수를 줄이는 꼼수와 노동 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기업인들에게 고용 보장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 후에 1935년부터 경제 공황에서 회복으로 실질임금이 오르고 독일경제가 완전고용 상태로 접어들면서 노동 계층의 정치적 압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그와 비슷하게 충성스러운 기업들의 대한 지원 역시 아끼지 않았다.[* 몇몇 이들은 나치가 충성하지 않는 기업을 억압했다는 점에서 나치의 사회주의적 면모를 강조하지만, 나치는 충성하지 않는 농민과 노동자들도 탄압하였다.] [[포르쉐]], [[메셔슈미트]]와 같은 군수기업에 대해서 충성의 대가로 여러 보조금을 주기도 하였고 [[기업]]들은 그 보조금을 타겠다 하여 [[히틀러]]에게 아양을아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히틀러는 '''충성스러운 이들'''에게는 지원을 '''충성하지 않는'''이들에게는 탄압을 가했다. 나치즘을 부르주아 계급에 의하여 만들어져서 부르주아를 위해 봉사하는 하수인으로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과는 달리, 실제로는 나치당이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의 위에 있었으며, 명령하는 위치였다. 그리고 나치당의 지지세력은 공무원, 교사, 퇴역군인과 같은 중간계층의 지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노동자들에게서도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즉 파시즘은 특정 계층만의 이익을 대변한다기보다는, 민족의 모든 계급에서 지지를 받았으며, 동시에 모든 계급에서 반대를 받았다. 이런 면에서 파시즘을 진정한 의미의 [[포퓰리즘|대중정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파일:나치 독일 반유대주의 포스터.jpg|width=40%]] >[[연합국|우리의 적들]]이 꾸미는 모든 음모의 배후에 국제 [[유대인|유대주의]]가 있다는 진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이 전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유대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차이와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연합국들을 한데 묶어두고 있는 접착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볼셰비즘]]은 동일한 유대적 뿌리에서 나오며, 한 나무의 다른 두 가지처럼 결국에는 같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국제 유대주의는 많은 국가들과 민족을 압제하여 복종시키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https://archive.org/details/RedeGoebbelsDieUrheberDesUngluecksDerWelt21011945|1945년 1월 21일 베를린, 주간지 'Das Reich']] '''나치당 반자본주의와 반공주의의 접점은 [[반유대주의]] 인종론으로 "공산주의는 유대 볼셰비키, 자본주의는 [[유대인 배후자본설|국제 유대자본]]"'''으로 통하는데 지금에서야 상반된 진영이 같이 유대인으로 엮이는 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치열한 노-사 대립보다 특정한 분석 틀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성향은 드물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특정 종교나 성별, 극단적인 민족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다.] 당시 독일에선 나치당뿐 아니라 교육받은 계층까지도 '''독일 민족의 것이 아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독일인을 약하게 만들어 민족성을 파괴하고 망하게 만들려는 국제 유대인들의 음모라는 떡밥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영미식 민주주의 체제는 금권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장악될 뿐이고 좌파 계열이 주장하는 계급 투쟁과 각국의 노동자 연대는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들의 야심대로 민족 고유의 특성을 박멸하여 세계 정부를 만드려는 음모론으로 해석한다. 나치가 공산주의를 유대민족의 사회주의로 보는 이유는, 당시 독일의 사회주의자 중에서는 [[카를 마르크스]]뿐만이 아니라, [[페르디난트 라살]], [[로자 룩셈부르크]],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같은 '''유대인들이 실제로도 많았으며''', 볼셰비키 중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소콜니코프 등도 유대계 혈통이거나, 유대인이었기에, 히틀러의 판단으로 독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사회주의는 국가와 민족이 없는 유대인식 사회주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가 인기가 많았고, 지식인 중에서 유대인의 비중이 높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게 적절하다.''' 여기에다 19세기 이전 유럽에서 유대인을 천민 취급하던 역사적 편견에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배후중상설]]도 한몫 한다. 나치당이 극우 정당인데도 당명에 [[사회주의]], [[노동자]]가 들어간 것과 관련하여 혼란을 주지만 나치의 사회주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모든 민족은 민족 고유의 사회주의'''를 지닌다는 가치 아래 독일식의 사회주의를 만든 것이 바로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이다. 그렇기에 나치당은 자신들의 이상적인 군주와 정치가로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와 같은 [[군국주의]] 국가를 이상향으로 여겼다.[* 나치에서 사회주의뿐 아니라 예술 문화 면에서 국제적인 요소를 띄는 사상이나 성향은 무조건 유대인 음모론 드립으로 흐른다. 나치와 히틀러 기준에서 사회주의에서 국제적 요소란 마르크스식 계급 투쟁으로 유대인식(?)인 계급 투쟁을 배격해야 한다는 식으로 흘렀다.] 따라서 독일 민족 고유의 국가사회주의란 서구의 나약하고 퇴폐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일 민족이 스스로 닦은 신시대 사회주의를 애기하게 된다. 그렇기에 독일의 25개 강령(25-Punkte-Programm)은 [[자본가]], [[노동자]], [[상인]], [[농민]]의 대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강령 13조는 사회 모든 기업의 국유화를 애기했지만 '''Trust'''를 받지 못하는 즉 '''신뢰받지 못한''' 기업에 한해서 국유화를 애기하였다. 이는 즉 국가에 충성만 한다면 국유화를 하지 않는다는 뜻에 해당된다. 14조의 대기업의 이익 공유 역시 13조에 의거하는 신뢰받지 못한 기업에 한정하여 이뤄젔으며 16조는 '''소상공인 지방자치화'''를 통한 '''상인 권력 증진'''을 애기하며 오히려 [[사회주의]]랑 전혀 딴판의 정책을 애기하기 시작했다. 18조에서는 모든 고리대금업자[* 이 당시 고리대금업자의 대표격은 [[유대인]]이였다.]의 사형을 요구하는 항목에서 보이듯이 '''이 강령은 [[사회주의]] 강령이 아니라 유대인 재산의 강제몰수를 말하는 강령이다.''' 강령 제 4조 '''유대인은 독일의 시민이 될 수 없다.'''를 통해서 이 강령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강령 22조 '''인민군의 창설'''처럼 [[사회주의]]적인 면이 보일만한 것이 있을 순 있지만, 독일 민족의 인민군 구상은 19세기 초반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란 사상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부터 있었다. 그리고 '''인민군 창설을 주장하던 [[에른스트 룀|룀]]은 히틀러에 의해 암살당했다.'''[* 출처:Das 25-Punkte-Programm der Nationalsozialistischen Deutschen Arbeiterpartei. vom 24. Februar 1920] 또한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나치]] 좌파가 과연 [[마르크스주의]]적이였냐 아니면 [[사회주의]]적이였냐라고 하기엔 애매한데 그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한건 아니였으며, 이들은 '''진보적인 사회주의나 우익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원시 고대 게르만의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고 이를 지지했다.''' 그조차도 히틀러는 용서하지 않고 싸그리 무너뜨렸다. >우리 국가사회주의자(National Socialists)는 경제의 국유화를 포함한 경제의 혁명을 원한다. 우린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나 '''영혼없는 유물론적 관점'''이 아닌 '''믿음있고 희생적이며 반이기적인 고대 독일인의 진정한 사회주의를 원한다.''' 공동체적 감정, 공동체적 목적, 공동체적 경제, 우린 '''민족혁명을 위한 사회혁명을 원한다.''' >---- >1925년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연설. 출처:Childers, Thomas (2017). The Third Reich: A History of Nazi Germany. New York: Simon & Schuster 즉 나치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란 것은 '''고대 게르만인 혹은 강한 독일(비스마르크나 프리드리히 대왕이 만든)의 모습을 우리 민족이 따를 사회주의다.'''라고 규정한 말 그대로 '''자기들만의 사회주의'''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국제주의적인 [[사회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다. 그렇기에 실제로도 나치당 좌파가 [[소련]]을 좋게 본 이유는 '''소련이 서구의 퇴폐에 저항하여 슬라브인만의 슬라브식 사회주의'''를 만들어서였지 [[소련]]을 정말로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정말로 소련을 지지했고 좋아했으면 '''슬라브인 전멸'''이라는 구호따윈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 Dietmar Gottfried: Nazis gegen Hitler. In: Telepolis, 23. September 2012. >'''빌어처먹게 고귀하신 귀족 나으리, 비곗덩어리 자유주의자, 증권시장 하이에나, 돈 자루 독재 금권정치인 놈들은'''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머리통 들이 모래 위를 구르게 될 것''' >---- > 요제프 괴벨스의 공격(Der Angriff)지 논평 < 대중 선동의 심리학(문제적 인간 2)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나치당과 히틀러는 같은 [[https://en.wikipedia.org/wiki/V%C3%B6lkisch_equality|독일민족, 더 나아가 북방계 유럽민족들끼리는 평등해야 한다는 사고관을 갖고 있어서]][* 다만 [[T4 작전]]이 행해졌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선천적이고 국가에 불필요하고 오히려 비용이 들어가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자들은 예외로 간주되었다.] 신분이나 계급이 아닌 능력을 중시한 인재 선발을 강조했고 전쟁중에 융커가 주류인 프로이센 장교단을 불신한 건 널리 알려져있다. 전통귀족이 장악한 육군보다는 공군과 해군에서 전쟁영웅 만들기에 열올렸고 육군에서는 평민 출신 장군의 대표적인 예시인 [[에르빈 롬멜]]을 띄우는데 이런 의도도 작용했다.[* 물론 이는 [[히틀러]]가 [[사회주의]]자여서 그런게 아니라 국방군은 [[히틀러]]를 '보헤미아 상병'이라고 여기며 불신했고 [[히틀러]] 역시 그런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프로이센]] 장교단을 거부한 것이다. 즉 권력 관계에 따른 불신이었고 자신과 기존 군인과의 지지문제로 자신만의 사병이나 평민을 진급시킨 일은 [[나치 독일]]뿐만 아니라 이미 고대에서부터 많이들 이루어진 일이다.] 서구 민주주의와 의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반감이 상당했는데 독일 제국이 패망하자 연합국에서 군부와 카이저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은 민주정부와만 협상한다고 선언해서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연합국에서 '''강요한''' 것으로 보았고 나치당에서는 '''토론이나 다수결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민주제 체제라는 것은 선거를 통해 유권자의 지지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영미나 프랑스 정치인들은 선거를 치르기 위해 자본가에 손을 벌려야 하고 또한 공약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잘 보여만 하는 구조상 그것은 금권정치와 연결이 되며 유권자들은 그때그때 이익에만 충실하지 시대정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결국엔 독일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은 전통적인 독일인의 미덕인 명예심과 충성심, 인내와 자기희생, 끝없는 의지와 노력주의로 가장 능력이 뛰어나고 위대한 인물에게 '''위임'''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급과 당파를 떠나서 민족 공동체를 위해 히틀러 중심의 [[지도자 원리]]로 지도자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치당 내 이념이 현대 한국 기준으로 좌나 우냐 따지는 건 무리가 있다.[* 영미식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부류가 우파고 그 반대가 좌파라는 것은, 나치와 비슷한 극우파가 2차대전 이후로 사그러들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온건우파들은 진짜 극우파들(융커나 왕당파 정치인)에게는 배척받았다. 왜냐하면 극우파들은 [[반동주의|자본주의가 발전한 산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국 시절에도 부르주아가 주도한 영국의 정치와는 달리, 독일제국의 부르주아들(주로 국민자유당에 분포)은 융커-관료-군부의 전통주의자들에게 눌려서 정치적 영향력이 사실상 없었다.] [[어른의 사정]]으로 늦춰지긴 했지만 귀족출신 상류층, 기득층 보수교회세력, 프로이센 상류층 출신 군부, 부르주아들은 나치 기준으로는 잘났다고 고개가 뻣뻣하거나 비리부패에 걸리는 순간 한번에 박살내야 할 대상이란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도 제대로 일 안하거나 조금이라도 허튼 짓거리가 보인다면 바로 박살날 대상인 건 변함없긴 했지만 말이다. 프로이센 군부는 뒤늦게 전쟁 후기에야 완전히 손을 봤지만 반나치적이거나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가톨릭 세력들은 정교협약을 무시하고 나치당에게 탄압을 받았으나 친나치 성향의 가톨릭 세력들은 친위대 고위급 인사들이 대부분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라서[* [[에른스트 칼텐부르너]]가 대표적 인물.] 보호와 혜택을 받았었다. 이와 똑같이 개신교와 나치당의 관계는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반나치 성향 고백교회의 등장으로 인해서 탄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다. 나치당이 성공을 거두면서 정치적 힘이 생겨나고 높으신 분들과도 연결이 많이 되는데 집권 전까지 기업인 중에서 나치빠 성향은 프리츠 티센[* 나치당에 몸 담았다가 1939년 돌연 망명해서 히틀러에게 속았다고 책을 낸다. 독일 최대 재벌 크루프사의 [[데릴사위]]다. 국내에도 있는 엘리베이터 브랜드 [[티센크루프]]의 그가 맞다. 히틀러를 키워줬다고(?) 일부 출판물서 은막의 제왕 겸 최종보스(?)로 꼽히는 후겐베르크는 크루프에서 월급사장이나 했던 인물이다.]이 거의 유일하고, 괴링과 햘마르 샤흐트가 히틀러와 재벌들 사이를 연결해주었지만 일회성으로 받는 돈들은 '''대부분 괴링과 히틀러의 호주머니'''로 들어 갔기 때문에 나치당 재정에 그리 의미가 있는 도움은 되지 못했다 한다. 부르주아들은 [[제3제국]]에서는 유대인 기업가들 빼고 딱히 큰 탄압을 받지는 않았는데 주 목적은 독일의 빠른 [[재무장]] 때문이었고 결과적으로 재무장과 전쟁으로 군수기업들이 큰 혜택을 보았다. 부르주아들의 도움이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전쟁에서 물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손을 잡은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재]] 업종 중에 유대인이 많았던 [[출판업]]과 [[유통]]업은 큰 타격을 받았고 영화 산업은 [[헐리우드]]에 이어서 2위로 바이마르 시대에 독일 영화산업은 유럽 모든 국가를 합친 것보다 작품 수가 많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나치 정권하에서 영화사는 3개만 남기고 그마저도 강제로 [[국유화]]된다. 그리고 혜택을 크게 받았던 군수기업들도 대가를 치루며 전후에 해체되거나 업종을 변경한다. 물론 이는 [[히틀러]]가 기업한테 빚진다고 [[메포 어음]]을 마주잡이로 발행한 문제도 어느정도 있지만 말이다. 나치당에 초기에 몸을 담았고 1925년 나치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차 세계대전시 참모차장과 군수총감을 겸하며 [[힌덴부르크]]와 공동결정권으로 사실상 독재자 역할을 했었다. 루덴도르프는 전시에 군수기업의 국영화를 추진했는데 이유란 게 없는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총력전]] 체제로 이행해야 하는데 '''기업인에게 가는 이윤이 아깝다는 것이었다'''. 군수기업의 이윤을 몰수해서 생산을 늘리고 노동자 몫을 늘리려는 것이 국가사회주의식 경제관이었다. 2차대전 후반에도 이러한 총력전 체제가 [[알베르트 슈페어]], 괴벨스 주도하에 추진되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어서 추진 실적은 거의 없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